커튼, 혹은 일그러진 스크린의 메아리
–황재민
황원해는 건축물, 그리고 도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회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고 체화한 장소에 대한 심상을 회화 위로 옮겨내고자 했고, 그에 따라 작업 속에 나타나는 시각적 요소는 매번 달라져 왔다. 때로는 유년기에 자주 보았던 단청 장식이 등장하기도 했으며(《판타스마고리아》(2018)), 때로는 거대 도시를 이루는 연속적 파사드가 주제가 되기도 했다(《제 4의 벽》(2020), 공간 형). 이처럼 과밀하게 포화한 도시가 주는 감각을 탐구함에 따라 작업은 종종 회화 캔버스를 초과하여 돌출되었다. 벽면으로, 또는 공간으로 확장된 황원해의 회화는 이른바 ‘확장 회화(extended painting)’의 양식을 공유하는 듯 보였다.
작가에게 도시란 무엇보다도 불가해한 것이다. 도시의 불가해함은 얼마간 보편적인 인식이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문화 이론가 맛떼오 파스퀴넬리(Matteo Pasquinelli)는 현대의 도시를 콘크리트의 히드라라고 불렀다. 그에게 도시적 삶이란 삶정치적 모순을 생산하는 계급 전쟁의 무대였다. 도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내부 식민화하고, 또 자본화한다. 도시에서 예술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생산하는 공모자가 되며, 문화적인 것은 물질적인 흐름으로 전치되어 상품화된다.(1) 도시의 스펙터클은 쉼 없이 변화하고 가능한 한 팽창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적 기반에 상처를 낸다. 멈추지 않는 도시의 거대한 운동을 지각하며, 작가는 이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신체는 도시에 위치하지만 정신은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할 때, 이와 같은 ‘튕겨 나옴’의 감각은 작가로 하여금 어떤 틈과 균열을 탐색하게끔 했다.
따라서 황원해의 회화는 하나의 ‘사이(in-between)’를 찾게 된다. 도시와 신체 사이, 평면과 입체 사이, 회화와 현실 사이. 이와 같은 ‘사이’를 함축하여 보여주는 재료가 있다. 작가가 사용했던 스크린 톤(screen tone)이다. 황원해는 스크린 톤이 독특한 물성을 지닌 재료라고 여겼다. 스크린 톤은 원래 만화에서 배경을 표현할 때 쓰이는 매체인데, 투명하고 납작하지만 동시에 입체적인 형상을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스크린 톤이 평면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재료라고 간주한 뒤 회화와 뒤섞어 사용했고, 이를 통하여 평면과 입체의 ‘사이’를 탐색하고자 했다. 황원해의 회화 화면 속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복잡함, 서로 뒤섞이고 겹쳐지는 레이어의 형태는 바로 그 ‘사이’를 구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구현한 레이어 구조에서 흥미로운 건, 해당 구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회화 화면 속 레이어는 선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각각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포화 상태의 화면에서 형상을 좇는 동안 눈은 문득 초점을 잃어버린다. 추상적 형상 속에서 언뜻 도시의 외벽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다. 황원해는 콘크리트의 히드라, 즉 도시의 운동이 부여하는 혼돈 상태를 감각하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분열의 심상, 글리치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사이’로부터 현기증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글리치에는 도시가 아닌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스크린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열이 그것이다. 작가는 평상시 작업을 할 때 디지털 환경과 아날로그 환경을 오간다고 말했다. 캔버스 위에서 작업을 하던 중, 그것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사진을 컴퓨터로 옮긴 뒤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편집기를 이용해 밑그림을 덧대는 등, 환경을 바꾸며 작업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 과정은 제작상의 용이함을 주기도 했지만, 감각적 균열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사진은 디지털 이미지가 되어 그래픽 편집기로 옮겨진다. 널리 알려졌듯, 디지털 이미지는 인간의 시지각에 의지하지 않은 채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생산이 가능하다. 컴퓨터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가상적인 눈, “영지주의적(gnostic)”인 전능한 눈에 의거한다.(2) 이때 인간의 눈을 초과하여 생산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인간과 이미지의 연결 관계를 침식(erode)시킨다.(3) 작가가 디지털 환경과 아날로그 환경을 오가며 작업할 때, 이처럼 침식된 연결은 또 하나의 틈새를 만들어낸다. 디지털 환경과 아날로그 환경 사이에서 탈상관주의적(discorrelated) 균열이 형성된다.
개인전 《Curtain》(2023)에서 황원해는 도시 풍경의 미시적 틈새에 주목한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도시 외벽 파사드에 거대한 스크린이 잠시 반사된 짧은 순간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거대한 스크린이 어떤 이유에선지 작동하지 않고 꺼진 순간, 그리고 그것이 반대편 어딘가에 위치한 건물의 외벽에 왜곡되어 반사된 순간. 이것은 오직 도시에서만 포착할 수 있는 매우 특정한 순간일 것이다. 작가의 신체는 스크린과 도시가 아상블라주된 순간에 반응한다. 거대 도시의 운동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에, 탈상관주의적 이미지와 인간 사이에 발생한 분열에 반응한다.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인 핼 포스터(Hal Foste)는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특유의 건축 양식을 인상 깊게 분석한 바 있다. 노먼 포스터와 포스터 앤 파트너스(Foster + Partners)가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유리 외벽의 스펙터클은 수정궁(crystal palace)이 상징하는 근대성을 암시했으며, 투명성이라는 민주적 가치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수행했다.(4) 하지만 할 포스터는 유리 외벽의 투명성을 뒤집어 독해한다. 그는 건물 안에서 하루를 보내야 하는 피고용인에게 투명성이란 바깥으로부터 응시당하는 듯한 감시의 느낌을 상기시켰으리라 적절하게 지적한다. 이때 투명성은 감시권력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고, 유리 외벽이 지향했던 근대적 믿음은 상실되어 버린다. 도시 곳곳을 차지하고 반짝이는 거대 파사드는 투명성의 이상이 정상 작동할 수 없는 사회를 스스로 폭로하는 아이러니처럼 기능한다.(5)
황원해는 투명성의 이상이 소진되고 스펙터클로만 기능하게 된 도시 외벽 파사드를 일그러진 거울의 이미지로 변용하고, 그곳에서 추상적 형상을 포착해 낸다. 거울은 장소 없는 장소다. 거울은 주위를 둘러싼 공간과 연결되어 있기에 현실적이지만, 거울 너머 저편의 가상적 장소로 통하기에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거울을 가리켜 헤테로토폴로지(hétérotopologie)의 과학에 속하는 일종의 비장소,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라고 말할 수 있었다.(6) 거울이 불균질하고 이질적인 어느 ‘사이’의 헤테로토피아라면, 그래서 ‘바깥(le dehors)’를 비춰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작가가 도시로부터 포착한 어떠한 형상 역시 ‘사이’를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일그러진 거울 속 저편에 놓인 불 꺼진 스크린은 도시의 속도로부터, 나아가 스크린의 속도로부터 빗겨 나간 ‘여기’를 비춘다.
‘사이’를 탐색하는 작가의 추상은 그 자체로 신체의 연장처럼 보인다. 황원해는 도심의 경험으로 인하여 분열된 몸을 경유, 도시가 주는 심상을 회화로 번안한다. 이때의 몸이란 아마도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가 신체 환영(body phantom)이라고 부른 몸으로, 주체 능력의 조건이 되는 신체 이미지를 생산하는 체현된 몸일 것이다. 신체 환영은 명백하게 외적인 대상을 자신의 신체 행동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신체가 몸에 붙박인 것이 아니라 몸 바깥으로 유연하게 확장 가능한 매체임을 입증하는 역량이다.(7) 작가는 체현된 몸을 경유해 틈새와 균열의 순간을 탐구하고, 퍼뜨린다.
하지만 어떻게 멈춰 있는 회화가 진정으로 ‘사이’를 탐구할 수 있을까? 다만 작가에게는 이를 아우를 수 있는 모티브가 있다. 다름 아닌 커튼이다. 커튼은 창 너머와 창 안쪽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창 너머에서 바람이 불 때 커튼은 주름 접히며 흔들린다. 커튼은 주름을 통하여 너머의 움직임을 채집하고 기록한다. 창 너머의 미시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반향하되 자신의 구조를 잃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그 자체로 회화의 매체성에 대한 은유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에 따르면, 오늘날 회화란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을 표지(mark)하고 경험과 정동을 기보(score)하는 매체, 시간을 저장(store)하는 매체다.(8) 경험, 정동, 시간을 채집하는 매체로써 회화는 너머의 시간을 반영할 수 있다. 《Curtain》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외부와 내부의 겹침이자 겹침으로 인한 일그러짐이다. 접힌 커튼의 주름으로부터 바람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듯, 회화에 기입된 형상으로부터 ‘사이’를 유추할 수 있다. 커튼이 흔들린다. 분명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1) 맛떼오 파스퀴넬리, 『동물혼』,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3, 240-269쪽.
(2) 알렉산더 R. 갤러웨이, 『계산할 수 없는 - 장기 디지털 시대의 유희와 정치』, 이나원 옮김, 장미와동백, 2023, 75쪽.
(3) Shane Denson, 『Post-Cinematic Bodies』, Meson Press, 2023, 48-49pp.
(4) 핼 포스터, 『콤플렉스 - 미술을 소비하는 현대 건축의 스펙터클』, 김정혜 옮김, 현실문화, 2014, 78쪽.
(5) 포스터, 같은 책, 98쪽.
(6)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48-49쪽.
(7) 엘리자베스 그로스, 『건축, 그 바깥에서 - 잠재 공간과 현실 공간에 대한 에세이』, 김재영, 강소영 등 옮김, 그린비, 2012, 65-66쪽.
(8) 데이비드 조슬릿, 「(시간에 대해) 표지하기, 스코어링하기, 저장하기, 추측하기」, 현시원 옮김, 『평행한 세계들을 껴안기 - 수천 개의 작은 미래들로 본 예술의 조건』, 현실문화A, 2018, 113-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