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협곡을 우아하게 벗어나는 열차의 스위치백 독무처럼.
–오웅진
#1.
자, 여기 두 명의 베스트 드라이버가 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체급의 차량을 운용하는데 실제 두 사람의 조수석에 모두 앉아본 사람으로서 이들의 운전 스타일에는 거의 접점이 없다 싶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두 드라이버 사이 가물게 일치하는 낭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차가 멈춰 섰을 때이다. 정차된 차. 그곳에서야 둘은 겨우 쉰다.
그러니 이들의 여정을 두고 《델마와 루이스》의 그것을 떠올린다면 조금 어색한 연상일 수 있다. 드라이버는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운영체제에 하드웨어를 인식시키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정의가 있다.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하드웨어를 추상화시키는 역할이다. 이는 또한 별다른 뜻이 아니다.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끄적거림에 동시대 가장 미학적으로 유의한 프로토콜을주입해 일련의 범용성을 확보하는 것. 즉, 내 신체 끝에서 발생한 것이 당신의 망막, 나아가 뇌에까지 유효할 수 있도록 평생에 걸쳐 해당 과제를 수행하는 이들을 우리는 대개 작가라고 부른다. 그러니 우리는 이쯤에서 두 작가를 다른 의미에서의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 전시를 황선정, 황원해 두 사람이 꽤 오랜 시간 서로를 마주보며 걸어온 내용을 담은 로드무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걷다 잠시 멈춰선 나들목(IC)으로서의 중간지점 둘. 황선정, 황원해 두 사람은 여기서 그 간의 대화 가운데 흥미로운 구간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로드무비의 역사를 톺자면 오디세이아와 같은 태고적까지 올라가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오늘날 청춘들의 전유물일 수 있는 까닭은 부지런히 자신을 걷게 하는(driving) 그 여정에 작은 힌트가 있다. 실제로 이번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증언하자면 이 둘이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언급한 문장은 “서로가 아니었다면 결코 내보이지 못 했을 시도를 용기 낸 작업” 이라는 표현이다.
#2.
가령 전시를 구성하는 큰 틀 가운데 하나로 〈Swithback1~5〉를 얘기할 수 있는데 이 전체 내러티브의 출발에는 선정의 음악 〈Vanilla Murk〉가 있다. 그녀가 전시를 위해 제작한 이 사운드트랙은 다분히 시각적인 음악을 표방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원해를 향해 내딛는 첫 걸음이다. 사운드에는 두사람을 둘러싼 도시의 각종 소리가 채집되어 있다. 바로 우측에 원해의 그림이 있다. 이는 선정의 음악 작업에 조응한 것으로 해당 작업을 설명하면서 그녀는 실제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다분히 촉각적인 식물인 미모사를 인용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해당 작품의 타이틀이 〈mimosa〉라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용기를 본격 정량화했다는 부분에서 모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캔버스에 촉각적, 즉 시각적이지 않고 더 나아가 비물질적이기까지한 요소를 품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고백하는. 이쯤 되면 바깥에서 관람하는 우리는 두 사람의 고유한 보폭을 각기 대조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작은 즐거움이다. 마치 비교문학 수업을 취미로 듣는 대학원생처럼의 실소처럼. 그리고 해당 회화 작업의 옆으로 선정의 유영하는 작업 〈Sunstone Harmonics〉가 재생 중이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켜켜이 쌓인 그림이다. 그녀는 자신이 주요하게 연구하는 미디어 장르의 매력 가운데 시간성을 자주 강조했다. 적층된 이미지는 이러한 시간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에 가장 강력한 도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가 이번 전시에서 시도한 용기의 단면은 외려 맞은 편 〈Sunstone Harmonics_cactus dream(tomo)〉에서 담뿍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재생되는 영상 가운데 특정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기존의 그녀라면 흐름이 중요한 본인 작업 가운데서 순간을 프레임에 가두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니 해당 이미지는 자신이 페인터를 향해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자 스스로에 대한 모험이기도 하다. 이렇듯 흘러나오는 선정의 음악 기준으로 왼편에 계속해서 엷게 스위치백이 계속 진행 중이다. 그리고 끝으로 원해의 〈cotula hispida〉. 전시장 출입문에 가까이 설치된 해당 작업은 원해가 선정의 프린트된 작업을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옮겨 담은 것으로 이 길었던 대화를 콜라주로 마무리 짓는 안녕이자 이 전시에 슬쩍 밀어 넣은 페인터식 가벼운 유머이기도 하다.
#3.
앞선 단락은 이 전시에 존재하는 한 단위의 시퀀스를 떼어 설명한 것이다. 실제 이 밖에도 작업 사이에 서사, 아니 더 나아가 인과를 추적할 수 있는 함수가 명료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이번 전시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관객이 이를 따라서 좇을 필요 없겠으나 전시를 좀 더 흥미롭게 보기 위한 힌트는 하나 전하고 싶다. 사실 이 전시의 흐름을 펼쳐 보이는 것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한줄 요약하면 “공시와 통시가 교차검증 속에서 피는 길티 플레저(guilty-pleasure)”로 단출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이건 내가 적으면서도 너무 명징과 직조 같은 느낌이다. 좀 더 부언하자면 이 전시는 크게 두 가지의 운동성이 그것을 추동하고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운동성은 각자의 매체가 긴 역사에 걸쳐 품어온 고유의 프로토콜에 위배되는 방향이라 관람하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흥미를 갖게 한다. 마치 작가의 숨겨진 취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처럼. 가령 회화는 제 매체 안에 시간을 담을 수 없다. 안료를 통해 캔버스 위에 환영적으로 시간성을 부여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귀여운 트릭이다. 그러니 황원해의 작업은 본태적으로 찰나에 우주를 펼쳐 보이는 공시적(synchronic), 즉 화면 위에서 짧은 시간 내 수평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시각적 설득력을 통해 자신이 미술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반면 황선정의 작업은 통시적(diachronic), 즉 시간의 경과로 발생한 차이와 반복에 기대어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니 수직적으로 관통하는 시간의 운동성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녀는 자꾸 옆으로 뻗는다. 그러니 황원해의 버티컬에 본능적으로 끌리고 원해 역시 선정 음악이 또렷한 가시성을 바탕으로 자꾸만 옆으로 퍼지듯, 그녀가 끝없이 옆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힐끔거리는 길티 플레저를 멈출 수가 없다. 서로에 대한 근원적 동경이 결국 전시라는 종착역에 끝내 도달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지나온 그들에겐 사태였지만 앞으로 볼 우리에겐 더 없는 오락이다.
#4.
두 작가의 전시 준비 과정을 지난 3개월가량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대가로 약간의 글을 쓰게 되었다. 전시장에 비치된 해당 글 『Switchback』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두 작가 사이를 묘사하는데 지금의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3차원의 캔버스, 비현실적 떨림을 주는 철도 구간, 빨대면서 담배이자 캔버스이도 한 하얗고 긴 막대(〈straw〉, 2023) 등 말도 안 되는 갖은 설정을 동원한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무언가이다. 작년의 나를 수습하느라 엊그제까지의 내가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그리고 스위치백. 앞서 언급한 글 가운데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참고로 국내에서 원칙적으로 열차는 후진운전이 불가능하다. 스위치백은 활자 그대로 마치 승용차의 기어를 바꾸듯 후진으로 열차의 주행 방향을 뒤로 바꾸면서 나아가는 구간, 혹은 그러한 동작을 일컫는 말인데 매우 협소한 비탈과 같은 구간을 지날 때 제한적으로 활용되는 특수한 열차 운행 방식이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철도 운행에서 꽤 드문 현상이기 때문에 열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해당 이벤트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록하거나 수집하기도 한다. 우리 역시 어쩌면 비슷한 맥락으로 여기 중간지점 둘에서 꽤 진귀한 상태를 목격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매체를 관찰하고 거기서 평소 동경하던 요소를 추출해 제 미디엄에 떨어뜨려보는 지금의 이 미술실험이 시간 지나 회상했을 때 어떤 시의 적절한 묘수였다. 마치 가파른 협곡을 우아하게 벗어나는 열차의 스위치백 독무(pas seul)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