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5. 9:40
정현 → 콘노 유키
안녕하세요, 콘노 유키 씨.
오랜만에 뵙기를 기대했는데 예측하지 못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뵐 수가 없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겠지만, 어제 황원해 작가께 전시 리뷰의 필진을 변경하기보다 이대로 진행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 아트딜라이트에서의 제 개인전 도록을 위해 정다영 선생, 윤원화 선생께 원고를 청탁드렸습니다. 두 분은 도면, 렌더링, 기획안, 다이어그램 등을 보고 전시가 열리기 전에 미리 글을 쓰셨습니다. 여기에는 건축 비평이란 설계안만으로 가능할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저를 비롯 건축 전공자인 필자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건축가에게 계획은 최초의 아이디어를 가시화하는 데 총력을 다하는 건축적 행위입니다. 반면 예술가에게 계획은 개념을 전달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해 보입니다. 심지어 설치 미술가라고 하더라도 계획의 정밀함에 앞서 현실과 마찰하는, 즉 1:1 스케일의 경험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올 초 황원해 작가로부터 《제4의 벽》 전시 서문과 리뷰를 청탁받았습니다. 그의 전시는 분명 회화 전시였지만, 기획안을 본 저는 다소 생경함을 느꼈습니다. 기획안은 전시 공간의 형태와 가벽 스케일을 심도 있게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캔버스 위의 물감이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관람객과 가장 가까이하고 있다는 점, 벽의 패턴과 그림은 사실상 그 어떤 도상이라도 상관없다는 점에서 이는 작가에게 새로운 프레임이자 미래를 위한 체계로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황원해 작가의 전시 서문은―제 전시 도록의 글들처럼―기획안으로 미리 경험한 공간의 구축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시 리뷰는 기획안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주목하는 마치 건축 리뷰와 같은 방식으로 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전시를 직접 보고 제가 예측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시를 보좌하는 조은지 디자이너의 브로슈어 작업, 그리고 전시를 볼 수 없게 된 비평가 콘노 유키 씨의 글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메일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어쩌면 저와 콘노 유키 씨가 나누는 메일 전문이 도록에 그대로 실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소 거칠지라도 그것은 전시 상황처럼 연속과 불연속적 패턴이 교차하며 이따금 유사한 패턴을 공유하는 모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메일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알려주세요.
즐겁게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정현 드림.
2020. 3. 16. 14:53
정현 ← 콘노 유키
정현 평론가님께
안녕하세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 주신 내용 잘 읽었고 아래는 이번 계기(아닌 계기)를 통해 제가 체감한, 어쩌면 체감하지 못한 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전시와 작품을 보지 못하는 시점에서 쓴 글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심리적인 고백일 수도 있고, 전시를 보는 일과 글을 쓰는 일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황원해 작가의 전시가 3월에 열린다고 인스타그램 피드로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시 시작일이 늦춰졌다는 소식을 나중에 봤는데 저는 늘 그래 왔듯이 스케줄에 넣어서 보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한국-일본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어 할 수 없이 방문 일정을 취소해야만 했습니다.
일본 역시 미술관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작은 공간에서 열리는 전시 몇 개도 조기 종료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SNS로 보는 전시 혹은 작품'과 같은 이미지가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돌파구를 찾았다고는 할까요.
그런데 어떤 측면에서는 요구되는 움직임이지만, 뻔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다들 실제로 루브르나 뒤셀도르프에 가지 않았음에도 거기에 소장된 작품을 이야기하고 또 연구하기 때문이죠.
SNS의 문제로 보이는 관람자와 전시의 실제적 경험은 애초부터 도록이나 지면을 통해 접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관람자와 전시 혹은 작품의 관계는 시각적 소비와 실제적 경험으로 대비가 되는데, 사실상 두 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른 차원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작품을 실제로 봐야 하는 입장이 옹호하는 실제적 경험은 인터랙티브를 강조하는 상업으로 넘어갔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아스거 욘(Asger Jorn) 전시에서 쌓여 있던 보관 박스나 일본의 팀랩(teamLab)처럼 말이죠.
다른 한편 시각적 소비는 실제로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가서 관람자('유저'가 되겠죠)와 작품을 화면상으로 연결해 줍니다.
이처럼 서로가 다른 효력을 발휘하는 시점에서 점점 시각적 소비와 실제적 경험이 얽히기 시작합니다.
앞서 언급한 팀랩의 경우 인터랙티브를 출발점으로 하지만, 결국 시각적으로 충격을 주는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고 관람객은 경험보다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한편 시각적 소비는 전시 공간에 휴대용 카메라와 휴대폰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미 전시장에서 사진만 찍고 있는 상황이 전시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때 따라오는 질문은 "전시장까지 가서 뭐하냐?"가 될 것 같네요.
이렇게 두 개의 축이 서로 역전하는 시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전자가 더 좋다거나 후자가 더 좋다는 식으로 판을 가르기가 애매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엔 공간에서 경험할 때 제약이 크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단체전의 경우 옆의 영상 작업 사운드 때문에 몰입이 깨지기도 하고, 작은 공간에서 열리는 전시의 경우 시끄러운 관람객이 오기라도 하면 작품에 집중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처럼 갑작스럽게 전시를 못 보게 될 때, 그 전시를 나중에 언급하려면 꼭 실제적 경험이 (우선될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말해줄까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사실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전시 공간에서 즉각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관람 후 전시 전경 사진을 받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과정이 글쓰기에 동반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실제적 경험과 시각적 소비의 과정이 (저의 경우는) 글쓰기, 특히 리뷰에 적용이 되는데, 황원해 작가의 이번 전시는 후자, 그러니까 시각적 소비를 통해 뒷받침되는 글로 나올 것 같네요.
(사실 평면 작업의 경우는 특히) 실제적 경험과 시각적 소비 사이의 관계에서 전자가 꼭 우선되어야 할 때 제기되는 이야기를 미리 던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물감의 겹침이나 양감 혹은 질감을 알려면 실제 눈으로 봐야 한다.
두 번째로는 지지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러니까 캔버스인지 출력물인지 등등.
세 번째로는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관객을 얼마나 압도하는지 혹은 그러지 못하는지.
이 세 가지를 제시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실제 공간과 실제 작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게 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다고 가정할 때, 그렇다고 전시 리뷰가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 나아가 실제 공간에서 감상했을 때 빠지는 요소가 (앞서 예시로 든 팀랩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처럼) 있지 않을지 고민해 보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두서없지만, 제가 지금 상황에서 생각하는 부분을 적어서 보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일본에서 콘노 유키 드림
2020. 3. 18. 21:11
정현 → 콘노 유키
콘노 유키 씨께.
보내 주신 메일 잘 읽어보았습니다. 말씀하신 실제 경험과 이미지를 통한 대리 경험, 그리고 비워진 정보를 메우는 것에 대해 아래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메일에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시각 문화 연구와 리뷰 대부분이 그 당시 보지 못한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해석해도 될는지요? 현재 진행형의 것을 좇기 어려운 상황, 전시를 보고 나서 다시 전시 이미지를 보며 정보를 첨가하는 행위 등 이 모두가 저에게는 비슷해 보입니다.
요즘은 전시장에 직접 들렀다고 해도 작품을 직접 보기보다는 여러 방향에서 전시 사진을 찍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SNS에 전시 사진을 올리기 전 다시 사진을 보며 전시를 복기합니다. 사진 촬영은 순간적이기에 모니터(스마트폰이건 PC이건)에서 사진을 살펴볼 때야 비로소 놓쳤던 것들을 발견합니다. 심지어 일부 사진은 왜곡된 투시도 등을 뒤틀어 이미지를 똑바로 펴내는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가짜 이미지입니다.
시각적 소비 경험에 대해서 언급하신 제기 요소들―양감, 질감, 지지체와의 관계, 사이즈 등―역시 사진 정보를 통해 되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수치로 분석하려는 제 직업적 습관 때문일까요?
이미지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인터랙티브 전시 상황에서도 직접적 체험보다 다른 관람객들이 SNS에 게시한 동영상을 통해 전시를 재인식합니다. 이 영상들은 구간 반복되며, 전시 주변 요소까지 유심히 살펴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전시 경험도 과거(저장 매체가 발전하기 전)에는 기억력을 밀도 있게 사용한 ‘진짜 경험’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기억 장치를 마치 클라우드 저장소처럼 따로 두고 있는―그렇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전시를 대충 찍고 자리를 뜨더라도 안심입니다.―‘가짜 경험’인 셈입니다. 그때 그곳에서라는 개념 또한 어쩌면 저장물(2차 생산물)을 얻기 위한 소스(source)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제가 리뷰를 하기 위해 활용하는 이미지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상 3번이 하는 일도 1, 2번으로 채우지 못한 나머지 정보에 대한 것이기에, 1, 2번이 다양하고 충분하다면 콘노 유키 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시 리뷰를 적기에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조은지 디자이너의 전시 브로슈어인데요. 본래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조은지 디자이너는 전체 배경지와 캔버스 이미지를 미리 확보해 가상의 전시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잘라 낸 브로슈어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전시 경험자들이 작품이 놓인 위치에 브로슈어를 가져다 놓고 재미로 찍은 사진들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이는 위 2번의 이미지가 노이즈 값을 많이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의 전시 사진이라면 작품만을 촬영한 것들뿐이겠지만, 현재 SNS에 올라오는 황원해 작가의 전시 사진은 캔버스 앞에 이 인쇄물을 놓고 찍은 것이 대다수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전시 리뷰 청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전시장에 직접 가서 가려진 부분들을 확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전시장에 더해진 인쇄물-노이즈가 이미지 정보에 빈 공간을 만들고, 저로 하여금 그곳을 메우게 하는 것이지요.
콘노 유키 씨께서는 이 정사각형의 빈 공간들(조은지 디자이너의 브로슈어가 만드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감사합니다.
정현 드림.
2020. 3. 25. 12:41
정현 ← 콘노 유키
정현 씨께.
안녕하세요, 좀 기간이 벌어졌지만 제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리뷰의 시간이란 말씀하신 3가지를 끌고 오되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글로 반영하는지가 관건이 되겠네요.
아마도 리뷰가 감상문이나 경험담과 다른 각도에서 포착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거리 두기(...)인데, 이는 첫 번째로 체험 위주의 관람 방식에 대비하는 자세로, 그리고 두 번째로 몰입에 의심을 더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리뷰를 어떻게 쓰는지 입장이 각각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리뷰에서 최대한 작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일종의 가상의 적(?)을 생각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작가의 주장, 감정, 언급을 요약하는 글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서 '내가' 전시를 봤는데도 쓰여지는 작가의 말이라고 할까요?
인터뷰를 옮겨 적듯이 리뷰가 나온다면 과연 그것은 누구의 글 혹은 말인지 모호하게 전달될 때가 많습니다.
그 대신 제가 보거나 못 본 것을 자기 자신의 말로 쓰되, 감상문처럼 쓰지 않으려고 의심하고 글을 쓰는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3가지의 이미지는 저를 설득한다기보다, 설령 설득력이 있고 납득이 될 만한 이미지라 해도, 끊임없이 벽으로 막아 세우는 것처럼 늘 와 닿습니다.
이는 브로슈어(이것 역시 아직 실제로 못 봤지만...)도 마찬가지지만, 브로슈어가 저에게 가져다주는 효과처럼 와닿았습니다.
황원해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금 전시 제목에 들어가는 '벽'이라는 말을 생각해 봤습니다.
페인팅과 인쇄, 작품과 인쇄물의 이미지는 모두 평면적이지만, 사실 미세한 변수들이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지체가 강조되거나 매끈하게 벽에 일체화되는 차이도 있고, 말씀하신 것처럼 브로슈어와 브로슈어가 가린 부분에 대한 차이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일종의 파사드처럼 등장한 브로슈어가 있다면, 작품은 부분들의 통합 아닌 조합일지라도 결국 브로슈어의 일부분이 되면서 부분과 전체라는 역학 관계의 무게 중심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부분 때문에 이런 판단을 잠시 보류하게 되는데요. 이는 궁극적으로 황원해 작가의 작품이 모두 평면에 의거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거기서 발생하는 차이점을 실제 감상을 바탕으로 파악하지 못해 벽처럼 와닿기 때문입니다.
스크린 톤의 표현이 인쇄물과 달리 질감이 부여되는 것처럼, 이번 전시는 공간에 혹은 개념적으로 통합된 벽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부딪히는 벽으로 와 '닿았'습니다.
따라서 가려진 부분은 (적어도 저에게는) 의문 혹은 호기심을 더 강력히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 외 다른 이미지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 공간에서 하는 경험도, 공유받은 '잘 찍은 이미지'도, 전시 계획서나 포트폴리오도, 그리고 실제 작품과 브로슈어도 정도의 차이일 뿐 여전히 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바꿔 말하면 알기 쉬운 경험이나 체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그 여지를 끄집어 또 파고 들어가는 작업이 리뷰(그러니까 작품의 리뷰, 전시의 리뷰, 감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리뷰, 그리고 보는 경험에 대한 리뷰 등등)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내용이 있으면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에서, 콘노 유키 드림.
2020. 5. 21. 21:29
정현 → 콘노 유키
안녕하세요, 콘노 유키 선생님 황원해 작가님.
그간의 메일 내용을 정리하여 전시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황원해 작가님의 작품 제목을 일일이 언급하는 식의 리뷰는 아닙니다. 코로나19 확진자 폭증 이후 현재 전시 상황을 벗어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올해를 기점으로 짝수 해마다 열리던 건축전은 홀수 해에, 홀수 해마다 열리던 미술전은 짝수 해에 열리는 것으로 변경된다고 합니다. 황원해 작가님의 미술 작품 속에 깃든 건축과 도시에 대한 관점을 건축가로서 리뷰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첨부한 리뷰를 즐겁게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현 드림.
2020. 5. 22. 01:26
정현 ← 콘노 유키
안녕하세요, 콘노 유키입니다.
보내주신 자료 잘 받았습니다.
저번에 전해주신 대로, 마무리하는 글을 준비하고 주말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콘노 유키 드림
2020. 5. 24. 23:40
정현 ← 콘노 유키
안녕하세요, 콘노 유키입니다.
먼저, 정현 선생님께서 교열해주신 편지 글을 다듬어서 다시 공유 드립니다.
매끄럽게 정리해주셔서 감사 드리며,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다시 쓰거나 아예 선을 그어 지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리뷰를 공유 드립니다.
공유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무탈히 지내시길 바라며,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본에서, 콘노 유키 드림
2020. 5. 25. 11:00
정현 → 콘노 유키
안녕하세요 콘노유키 님,
아무래도 편지 글은 말하는 느낌에 더 가깝께 쓰다보니 서로 느낌으로 대화하는 것 같습니다. 제 글을 다시 돌이켜 읽고나서 초타원형 출판 편집부 김상훈 부장님께 교열을 부탁드렸습니다. 덕분에 두서없던 제 글이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콘노 유키 님께서 좋게 보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최초 저희가 리플렛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들을 원고에 넣지 못하여 아쉬웠던 차에 콘노 유키 님께서 한번 더 정리해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디자이너와 작가와의 협업관계가 굉장히 긴밀해진 요즘 필요한 이야기라고도 생각됩니다. 아울러 본 메일과 리뷰 글 등이 모여 글이 굉장히 많은 도록이 될 텐데, 이를 조은지 디자이너님께서 다시 어떻게 황원해 작가님의 작품에 맞춰 편집하실지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바쁜시간 동안 메일로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머지않아 왕래가 훨씬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정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