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대리 감상의 여지에서: 지금-이곳-경험의 끊긴 부분들에서 전체를 미루어보기
–콘노 유키
리뷰를 쓰는 시간은 전시장을 방문하는 지금 이곳에서 경험되는 시간과 동일하지 않다. 전시를 상기하고, 시각 자료를 공유 받고, 글을 쓰고 또 지우는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이곳-경험의 전체 연결에서 끊겨 나간 부분, 그 ‘부분들’을 어떻게 (다시) 그러모아 쓰는 자세가 리뷰에 요구된다.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고, 서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그때 내가 어떻게 작품을 감상하고 또 못 했는지를 다시 고민하면서 리뷰는 작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리뷰는 통합된 경험에서 스스로를 멀리 하면서 획득되는 경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세계적인 판데믹의 영향을 받아서 전시 공간을 실제로 방문하지 못하는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 사는 필자는 작가 황원해의 개인전 <제4의 벽>을 실제 공간에서 감상하지 못했다. 단순한 해석으로 연결 지으려면, “전시 <제4의 벽>은 글쓴이의 경험―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대변해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품은 전세계적인 판데믹을 예견하지도 결과론적으로 귀결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번 판데믹이라는 특정 사태는 작품과 작가에게, 그리고 리뷰를 쓰는 필자에게 전적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런 수렴 태도와 달리, 이번 전시를 작품과 전시를 ‘보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감상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건축물의 파사드와 스크린톤을 평면에, 그러나 다른 매체로 재현한 이번 전시에서 ‘보는 사람’은 과연 어떻게 감상을 할까? 다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실제 전시 공간에서 감상하는 방법, 두 번째로 전시 기록 사진을 보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SNS에 공유되는 이미지를 통해 어쩌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방법이다. 어느 하나의 방법으로만 감상한 사람도 있고, 세 방법 모두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관계로 두 번째와 세 번째로 방식으로 관람했고, 그 감상을 바탕으로 이번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은 첫 번째 관람 방법에서 파생된 결과로서 필자에게 대리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필자는 (앞서 말한 첫 번째 감상 방식에 해당되는) ‘지금-이곳-경험’이 성사되지 못한 채 지금-이곳의 대리물인 기록 이미지를 통해서 전시와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서로 대응하는 대리물이라고 할 수 없고, 그 불가능성을 포착한 점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전시 공간에서 감상을 하는 경우, 보는 사람은 파사드의 난립과 깊이가 거부된 스크린톤의 효과 때문에 ‘지금-이곳-경험’에서 몰입의 성격이 배제된 채 경험한다. 이런 측면은 작가가 설정한 ‘제4의 벽’의 특징을 잘 대변해준다. (드니 디드로가 제시한 개념을 경유해서) 작가는 “무대(실제 공간)와 객석(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며 간섭할 수 없는 가상의 벽”으로 ‘제4의 벽’을 받아들이는데, 이때 간섭할 수 없음은 ‘실제 공간’이라는 말, 바로 관람자가 있는 ‘실제 전시 공간’의 ‘공간’이라는 말에 결과적으로 빗금을 치면서, 몰입이 아니라 막아서는 벽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디드로가 주장한 개념을 끌고 오면서 오히려 주제나 공간적 몰입이 결합된 연극적 측면을 거부함으로써 ‘벽’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이때 벽은 단일한 평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 즉 건축의 내부 아닌, 그러나 건축물을 특징짓고 대표하여 보여주는 파사드가 서로 충돌하는 벽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상자는 표현 대상인 건축물의 일부분(들)뿐만 아니라 그리기와 복사하기가 얽혀 연극적 측면이 결여되고 충돌의 장이 된 평면인 벽을 공간에서 마주 한다.
다른 한편, 두 번째와 세 번째 감상 방식은 이 벽을 매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즉 보고 그런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두 번째 관람 방식과 달리, 세 번째의 경우 우리는 전시장에 비치된 브로슈어와 작품의 일부분을 매치한 사진을 보게 된다. 그 이미지는 브로슈어 이미지가 실제 작품을 가린 상태로 우리 시야에 도착한다. 첫 번째 감상 방식에서 부각된 벽의 속성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관람 방식에서 지금-이곳-경험 대신 꽤나 매끄러운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전시 공간에서 전체 중의 일부를 가리고 그 일부를 기록물로 남길 때 지금-이곳-경험의 관계는 끊긴다. 마치 크로핑 하듯이 그 너머에 펼쳐진 이미지에서 어떤 특정 부분으로 추려진 브로슈어 이미지는, 연극적 속성이 거부된 그림 앞에서 관람객에게 보다 능동적으로 작품을 마주 보게 한다. 하지만 브로슈어를 매개로 증거샷처럼 남은 이미지는 온전한 대리 감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지금-이곳-경험이 끊겨 나간 결과, 우리는 전체를 남긴 채 그 부분들의 경험으로 작품 또한 부분적으로 보게 된다. 보는 사람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은, 전시장에서 찍은 기록물을 매끄럽게, 말하자면 질료적 측면을 전달하지 못한 채, 그리고 전체 중의 나머지 부분을 잘라낸 채 ‘(작품 자체가 아닌, 상像을 간직하는) 이미지를’ 보게 된다. 작품에서 다뤄지는 소재와 배치, 결과적으로 일컬어지는 ‘평면’ 매체가, 그리고 브로슈어의 인쇄된 평면으로 매개되듯이, ‘보는 사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벽을 경험하게 된다. 이 벽은 세 관람 방식이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말하자면 서로가 같은 경험으로 성사되지 못하는 지점을 더 부각시킨다.
이미지, 바꿔 말해 시각적인 대리물은 우리에게 전시를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른 지점’으로 나타난다. 공간을 방문하지 못한 글쓴이의 상황이나 전세계적인 상황을 예측하기도 전에, 이번 전시는 스스로 부분들로 나아가고 다른 한편―그러나 같은 지평 위에 여전히 전체를 간직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작품과 전시가 부분(들)과 전체 사이에서 요동치면서 감상자가 보고 경험하는 일에 대해 다시금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분들이란 작가가 선택한 건축물의 일부, 그리고 스크린톤이 함께 섞인 채 펼쳐진 평면뿐만 아니라, 브로슈어에 일부만 나온 작품 이미지, 그리고 SNS 피드로 공유되는 이미지, 나아가 오로지 시각에만 제한된 경험도 해당된다. 우리는 충돌의 벽에 얽힌 소재와 매체보다 훨씬 매끄러운 벽을 시각적 기록물을 통해서 마주한다. 잘 다듬어진 전시 전경, 질감이 결여된 인쇄물, 그리고 부분만 보이는 작품, 이 모든 의미를 가리키는 ‘매끄러움’은 전시를 ‘부분적으로’ 보여주지만 동일한 것으로 대변해주지 않는다. 세 번째 관람 방식이 그렇듯이, 브로슈어가 가린 ‘작품의’ 일부를 대리 감상하게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과 감상 경험의 대리물에 불과하며 SNS 피드 넘어, 바로 전시 공간에 펼치는 전체 작품을 보기 힘들다.
실제로, 바꿔 말해 실제 경험으로, 실제 전시 공간으로, 그리고 제 시간으로 전시와 작품이 전달되지 않을 때, 이번 전시에서 브로슈어는 대리 감상으로 메울 수 없는 여지를 포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브로슈어는 작품의 일부를 가리면서 그 너머의 실제로 존재하는 전체 작품과 전시를 향해 열린 창문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브로슈어는 투명한 재질로 제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보는 사람’―실제 전시 공간에서 작품 앞에 브로슈어를 갖다 대는 사람과 SNS로 그 장면이 기록된 이미지를 보는 사람 모두―으로 하여금 그 너머에 있는 작가의 실제 작품과 공간 형이라는 실제 공간에서 열린 전시를 미루어보게 한다. 이와 같이 브로슈어는 미루어보는 매개로 기능하며 보는 사람이 대리물(인쇄된 브로슈어 이미지 자체나 기록된 사진)로 충분히, 바꿔 말해 ‘충만하게’ 감상하지 못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이때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그 일부‘뿐만 아니라’ 일부 너머 펼쳐지는 전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