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송고은(독립 큐레이터)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 (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
[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
[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
[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