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시를 마치고...
–최정윤
이전에도 몇 차례 보안여관에 전시를 보러갔던 기억이 있지만, 발을 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는 바닥, 낡아서 먼지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벽, 기둥으로만 남아있는 구획의 흔적 등 오래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공간에 현대미술 작품이 잘 어우러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문에 그간 평면 작업에만 오롯이 집중해 온 작가 황원해가 보안여관에서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랜 시간 준비한 그의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그러한 걱정이 기우였음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보안‘여관’이라는 공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공간은 두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별 방의 크기는 우리가 실제 거주하는 방, 거실의 크기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작은 정도로, 관객은 비교적 일상적인 스케일에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작가 황원해는 작은 개별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공간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양한 구성으로 전시를 꾸렸다. 출품한 작품은 모두 신작으로 구성되었다. 개별 방에 설치된 작품들은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었지만, 재료나 설치 방식 등에서 개별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전시장 1층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방에는 설치한 <Crack-ing>은 말 그대로 크랙(crack; 갈라지다, 금이 가다)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다 낡아서 대부분 떨어져나가거나 빛바랜 벽지 사이사이에 황원해의 작품의 일부를 직접 삽입해 넣었고, 캔버스 위에 완성되어 있던 그의 혼재된 도시풍경은 일부 뜯겨져 나가 있는 형태로 그려졌다. 작가 황원해가 지속적으로 다루어 온, 도시 내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여러 건축적 양식이 혼재된 형태의 건물의 풍경이라는 주제는 보안여관에서 실제 공간과 작품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직접적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건너편 방에는 <Reconstruction>이 설치되었는데, 깔끔하게 마감된 벽 위에 황원해 작가 특유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아크릴 회화 작품을 걸었다. 미니멀한 창과 단청의 문양이 뒤죽박죽 뒤얽혀있는 이 고층 건물은 인간들의 욕망에 따라 끝없이 덧붙여진 과장된 형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시장 내부와 외부를 잇는 창문에는 자신의 이미지 일부를 필름 위에 출력해 반투명한 시트지처럼 붙였는데, 옆 건물의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뒤얽혀 황원해가 만들어내는 상상적 풍경이 현재의 시간과 같은 타임라인에서 공명하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1층의 가장 안쪽 방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서는 <Flake>가 설치되었다. 네모반듯한 규격화된 크기와 형태의 캔버스에 자신이 상상한 풍경을 맞추어 구획하는 일에서 벗어나, 각각의 형상을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는 캔버스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캔버스는 형태 자체뿐만 아니라 보이는 방식에서도 자유로움을 획득했다. 그의 쉐이프드 캔버스는 벽에 안락하게 기대어 있지 않는 대신, 바닥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세워진 좌대 위에 놓여 있어 여러 방향에서 관람을 유도했다. 예전에는 캔버스가 작품의 배경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 황원해의 작품은 평면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공간 자체를 캔버스 삼고, 그 안에 여러 쉐이프드 캔버스와 다른 오브제들을 함께 디스플레이하여 그가 상상하는 세상을 3차원의 공간으로 꺼내어 선보인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왼편에서 볼 수 있는 <Waving Facade>는 필름지 위에 출력한 이미지로, 벽에 거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황원해는 평면 회화 작업을 구성할 때 수집한 이미지, 촬영 이미지를 비롯한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활용해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상에서 가상의 공간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을 전시장 안으로 그대로 옮겨 가져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실제 보안여관의 낡은 건축적 요소와 작가의 스케치, 필름지의 고유한 문양 등이 더해져 여러 겹의 레이어를 공간 내에서 펼쳐서 보여준다.
<Between the lines>라는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하학적인 형상과 색으로 환원되어 있는 작품이다. 다른 회화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건축물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많았다면, 이 작품은 보, 기둥, 처마와 같은 건축물을 구성하는 요소 일부만을 조합해 만든 형상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기능이 제거된 듯 보이는 요소들을 쌓아 만든 가상의 탑은 기존의 레퍼런스에서 더욱 거리를 두고 형상 그 자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보안책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입구 위에 걸려있는 색으로만 구성된 색면 회화가 이러한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 파스텔톤의 녹색과 주황색의 컬러는 화면에서 시작되어, 벽면에 함께 디스플레이된 오브제 위에서도 반복되며 공간 전체로 확장된다.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이 다 중요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절정을 보여주는 방을 굳이 꼽는다면 2층 오른편에 두 개의 방을 꼽는 데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는 전시 제목과 동명의 회화 작품 <Phantasmagoria>와 함께 <Boan Inn 1.5 pyong>이 설치되어 있다. 가로 291cm, 세로 162cm로 두 점의 캔버스를 이어 제작한 이 작품에는 앞서 다른 작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전통과 현대 건축물에서 발견 가능한 다양한 요소들을 조합해 만든 풍경이 담겨 있다. 언뜻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 사용 가능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추상적 덩어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인물을 비롯한 생명체의 부재는 화면 속에 담긴 공간을 더욱 삭막하고 간조하게 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화면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비단 형상의 레퍼런스가 이질적인 것 이외에도 다양한 표현 기법이 뒤섞인 풍경임을 알 수 있다. 매트하게 처리된 표면부터 붓질의 움직임을 잘 드러내는 페인터리(painterly)한 터치까지 한 화면에 담겨있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함께 병치시키고, 현실에서는 영원히 타협 불가능한 상반되는 가치를 작가 황원해는 그의 작품 안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일종의 ‘통일’을 이루어낸다.
<Boan Inn 1.5 Pyong>는 <Phantasmagoria>를 3차원의 형태로 끌어내어 구현한 듯 보이는 작품이다. 단청(丹靑)은 한국 전통 목조 건물에 여러 빛깔로 무늬를 그려 장식하는 것으로, 청, 적, 황, 백, 흑을 기본으로 한다. 현대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전통 한국 건축에도 관심을 둔 작가 황원해는 비록 실제 나무 위에다 한 것은 아니지만, 단청도감을 기반으로 하여 그 일부를 되살려내는 일을 한다. 그가 전시장 내에 재현해 낸 단청은 자신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그려 온 것이다. 각기 다른 크기의 프레임들을 나무 골조의 벽에 설치하여 재현해낸 단청을 방 안에 놓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거울, 투명한 컬러 시트지를 통해 형형색색의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우며, <Phantasmagoria>를 공간 안에 축조해 낸다. 전시가 이루어진 공간이 깨끗하게 마감된 화이트큐브가 아니기에 더욱 공간과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오래된 한옥의 지붕과 네온컬러의 창문은 그 자체로 기이한 풍광을 만들어냈다. 방 뒤쪽으로는 트레이싱지에 작가가 구성한 요소들의 도면을 함께 설치하여, 실제 이 공간에 맞는 장소특정적 작업을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도록 했다.
보안여관에서가 아니면 어느 곳에서 전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전시는 보안여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시였던 것 같다. 보안여관은 오래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창문 너머로 현대적 카페와 한옥의 지붕이 건너다보이는 곳이며, 또 맞은편에는 경복궁이 위치해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서울이라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 거주하면서 이질적 시간성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의 혼재된 양상을 보여주는 황원해의 작품은 이번 전시 <판타스마고리아>를 통해서, 보안여관이라는 공간에서 선보여진 장소특정적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평면을 넘어서 공간으로 침투했다는 것 이외에도 공간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을 통해 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더 나아가 점차 색과 선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건축물은, 집은 중요한 장소로 기능하며 이러한 주제로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들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황원해의 색깔과 관점이 어떻게 확장되어 나갈지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