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남의 경계에서, 회화의 자리를 모색하기
–심소미(독립 큐레이터)
애초에 작가가 그리고자 한 풍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불가능성이란, 현실에서 절망적으로 실패한 어느 이상적 시공간의 구축에 관한다. 황원해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몇 가지 특징으로부터 오늘날 도시를 그린다는 것, 그 이상적 구축의 불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초기작에서 화면을 지배하는 요소가 ‘공간의 구축’이라 한다면, 최근 작업에서는 ‘파사드의 패턴’으로 이동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구조’와 ‘패턴’을 회화의 언어로 전환해 본다면, ‘공간성’과 ‘평면성’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근작에서 몰두되는 평면성은 세계를 지각하는 지배적 감각, 즉 이미지의 지각 방식과 관련이 깊으며 동시대 회화 경향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유념할 점은, “작업이 얼마나 동시대적인가 혹은 새로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감지한 세계의 감각이 “스스로의 회화적 고민과 언어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가?"이다.
그러한 의문을 두고 황원해의 작업을 살펴볼 때, 그 형식과 기법이 도전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하여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눈에 띤다. 바로, 도시 공간이다. 분명하게는 도시에서의 건축 공간이라 하겠다. 2010년 이후 전개된 작업에서 그의 회화는 공간의 차원을 구현하는 나름의 질서를 가져왔다. 이때 모색된 구축의 체계에 마치 균열을 일으키듯 개입하고 있는 것은, 전통 건축의 요소이다. 직선적이고 투명한 유리 파사드의 건축 구조에 부분적으로 결합한 단청의 문양과 형태는 화려한 색상과 장식적 구조에 의해 현대건축과 대비적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다소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결합을 이뤄낸다. 부조화와 뒤틀림까지도 건축 구조의 한 부분으로 포용하고 있는 초기작은, 마치 현실에서 불가능한 시공간을 뒤틀고 해체하면서 융합하려는 실험을 벌인다. 오늘날 전통의 파편이 일상에서 무거운 상징 혹은 작위적 미장센으로 잔존하는 현실을 반추해 볼 때, 작가의 관심이 혹시나 현대건축 풍경에 대한 비판적 응시이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흔적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사적인 유년기의 기억과 관계해 등장한다는 데서 상징성이나 의미에 앞서는 무의식적 잔여물로 화면에 잔존한다. 이 흔적이 공간에서 내밀리고 점차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을지라도, 단청이 사라져가는 여정은 현존할 수 없는 존재의 저항력에 대해 고민케 할 것이다.
단청의 존재가 희박해지는 여정은, 2018년의 <판타스마고리아>(보안여관)과 2020년의 <제4의 벽>(공간 형) 사이에 걸쳐 일어난다. 이 두 전시를 두고 보자면, 작가의 회화가 급격하게 ‘입체적 구축'에서 ‘표면으로의 탐닉’으로 이동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두 전시 모두 공간의 성격에 긴밀하게 반응을 하고 있으나, 그 방식과 태도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판타스마고리아>에서 작가는 폐허의 인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안여관의 공간과 물성, 표피까지도 긴밀하게 반응하면서 작업의 2차원적 요소를 3차원의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하기를 시도한다. 시간 속에서 헐거워진 낡은 벽지 위로 그림이 얹혀 지고, 공간의 훼손된 구조가 화면에 스미어 서로의 시간대를 중첩하고 덮어내고 매개하는 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청의 형태와 구조는 화면 밖으로 나와 입체적 차원을 갖는 등 적극적으로 3차원의 공간적 경험에 반응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제4의 벽>은 이전 전시와 완전히 상반된 태도를 갖는다. 이전 작업에서 시각적으로 분명하던 입체적 공간 구조가 사라지고, 평면적 구조와 추상적 패턴이 반복적으로 화면을 점유한다. 또한 앞선 전시에서 부각된 단청의 형태는 더 이상 구조가 아닌 패턴으로서 화면에 자리하면서, 무의미한 표식으로서 잔존하기를 자청한다. 건축물의 구조, 파사드의 패턴, 단청 등 기존 작업의 요소를 화면에서 동일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이를 배열하는 시점과 위상의 전복을 통해 회화적 변화를 크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제4의 벽>에서 화면의 구축은 3차원이라는 입체적 구조에서 벗어나, 실제 전시 공간의 정보 값, 벽면을 덮고 있는 출력된 시트지의 정보 값 등 다양한 표면의 정보와 긴밀히 교환하면서 생성된다. 이때 작가가 참조하고 있는 스크린 톤의 무한 반복적인 패턴, 이에 반응하여 캔버스 위에 생성된 패턴은 평면과 공간 사이,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을 서로 간섭하듯 영향을 미친다. 컴퓨터에서의 에스키스와 캔버스 화면에 이를 반영하여 그리기, 이후 이를 사진 찍어 다시 컴퓨터로 옮기고 또다시 화면에 반영하여, 서로가 서로를 참고하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서의 어긋남은 증폭된다. 회화와 사진, 그리고 스크린의 지각 사이에서 증폭된 어긋남을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결국 회화이다. 작가는 이 어긋남에서 오는 오차를 최소화하려는 듯, 때때로 재현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이 차이의 반복을 재생산하는 것으로 그리기의 유희를 획득한다.
황원해는 이렇듯 잃어버린 시공간의 차원을 화면에서 온전히 구축하는 것 대신, 물성과 비물성 사이, 평면과 입체 사이, 패턴과 구축 사이, 스크린과 파사드 사이에서 유실되어지는 정보 값과 간극을 파고들어 회화의 잠재된 감각이 차차 표출될 자리를 마련한다. 여기서 회화는 고유한 물성과 환영을 구축하기보다는,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오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영토를 슬며시 확장해 나간다. 그렇게 완성된 작업에서 공간의 위상 정보는 평평하게 누그러져 있으며, 대신 여러 막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차 값과 유실된 정보의 빈틈에서 역으로 회화가 표출된다. 그렇게 재현의 어긋남을 파고든 작가의 회화는 시공간이 통합된 이상적 공간을 구축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시인하는 동시에, 그 이상이 실패한 자리에서 평면 언어의 또다른 가능성을 도전적으로 제시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