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고 추측하여 상상하기
–신지현(독립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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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이라는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3D), 지면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2D), 그리고 이와 평행선을 달리는 현실의 연장으로서의 웹 공간을 질주하는 «cut! cut! cut!» 프로젝트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길 시도한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전통적 범주의 전시를 벗어난다. 이미 동시대는 매체의 발달에 따른 공간의 확장을 넘어서 디지털 매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새롭게 등장한 공간은 실재의 영역을 잠식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공간이 되어 이제 혼종화(Hybridization)된 채 모두가 ‘현실 공간’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매체공간도 실재공간도 ‘혼합 현실(mixed reality)’이 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공의 개념은 «cut! cut! cut!» 프로젝트의 근간을 이룬다. 크로노스(chronos)적인 시공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프로젝트의 구조 안에서 현실 세계의 시공은 당연하게도 무용하다. 미래에 서서 과거를 향해 걸어가는 이 글은 실재공간(서울, 제주)과 매체공간(지면, 웹)을 오고가며 이들이 펼친 «cut! cut! cut!» 프로젝트를 ‘사이공간’이라는 연결고리 없는 장면(cut)들로 바라보며, (선형적으로) 순서를 바로 맞추지 않고 재조합하여(post-production) 살펴보길 시도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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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이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프로젝트의 제목에서 으레 느껴지는 바와 같이 이들은 공간을 나누어(cut), 작품을 자르고(cut) 그 컷(cut)을 전시하였다. 영화적 용어로서 ‘컷’이 새로운 접합을 위한 장치이자 영화적 시공, 그러니까 가상의, 개념적이고도 환상적 세계를 구축해내는 마술적인 한마디라고 한다면 전시공간(«cut! cut! cut!-Index»)에 타임라인같이 펼쳐진 이미지의 흐름(stream)은 다소 영화적이다. 실재공간 안에 비물질적 시공의 감각을 끌어다 놓은 듯 보인다는 점에서 다분히 환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조금 그곳은 어긋나 있고, 관람자로 하여금 완벽한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며 열화된 작품은 파편적 이미지로 존재한다.
#2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포착 가능한 이들의 다종다기한 이미지는 디지털 매체와 전통적 매체를 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주얼 리터러시(Visual literacy)에 대한 탐구라는 맥락에서 교차점을 공유한다. 필름 위 유동의 물질을 밀착 인화하여 자체의 물성이 이미지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거나(오연진), 시간이라는 비물질적 개념을 지지체 위에 수치화하여 보여주려는 개념적 시도(유지영)는 이미지를 담지할 수 있는 물성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겠다. 한편 게임, 애니메이션 등에서 수집한 장면을 3D프린팅을 통해 물질로서 치환하며 발생하는 어긋남을 다층적 시점으로 재현한 작업(주슬아)이나 그간의 작업에 대한 단서이자 동시에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오브제로서 이미지를 생성하려는 시도(황원해) 등은 매체 특정적 경계로부터 벗어나 그저 이미지 차원에서의 레이어를 눈앞에 드러내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겠다. 또한 그간의 회화 안에서 소외되어온 주변부를 그러모아 “이미지의 연대”를 조직(김정인)하거나 실재 풍경을 로드뷰를 통해 재캡처하는 방식으로 풍경의 풍경을 재료 삼아 걸음걸이로 배치하는 작업(이은지), 웹/지면과 연동하는 그리드의 나열(조은지)은 프레임 너머의 세계를 조망하게 한다.
#3
기획팀(김정인, 이은지, 황원해)은 애초에 서문을 통해 주어진 제약을 조건 삼아, 이를 내파해 나가기 위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첫 전시(«cut! cut! cut!», 새탕라움)에서의 출품작들이 “A4 비율의 프레임”을 전제조건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자. 김정인, 조은지, 주슬아, 오연진, 유지영, 이은지, 황원해 일곱 명의 참여작가가 국제표준화기구가 제정한 종이 표준규격, 그리고 디지털 디바이스 규격의 창(window) 너머로 크롭 된 작품을 봐야만 하는 상황 안에 크기와 성질이 천차만별이었을 자신의 본래 작업을 밀어 넣는 순간, 당연하게도 (유일성, 원본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 작품의 개념은 휘발되어 버린다.
#4
전시장에 놓여있는 A4 비율로 재단된 작품들은 지금 여기(물리적 공간)에 머무는 감각이 아닌, 도래하는 미래(지면 전시)를 상상하며 ‘편집’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전시를 구조화하는 이들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겠다. 이때 “상상하기”는 전시를 보는 이들에게 기획팀이 요청하는 중요한 감각이 된다. 이 태도는 «cut! cut! cut!»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바, 실재공간에 가상공간의 문법으로 흐르는 타임라인적 시공을 가시화하는 구조(«cut! cut! cut!-Index»)는 이 공간에 들어서는 관람자로 하여금 전통적 감각으로 전시를 해독하는 것이 아닌, (지면 혹을 웹페이지라는) 매체공간을 상상하게 하고, 반대로 지면/웹 전시(www.jo-eunji.com/cut_cut_cut)를 통해서는 전시가 열렸을/열리고 있을 실재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2차원에서 3차원을 바라보게 하고 3차원에 서서 2차원을 떠올리게 하며 이들은 ‘혼합 현실’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5
전시는 매체 안에 구축되었을 레이어를 해체 시켜, 보통의 전시장이었다면 완결된 상태만을 보여주었을 작업들에 대하여 전혀 다른 시각을 제안한다. 수행성이 이미지/작품을 통해 스스로 연장되고 확장될 수 있는 기제라면, 제주와 서울 그리고 웹과 지면 위에서 끊임없이 편집, 반복, 실행된/되고 있는 이 전시 역시 스스로 몸집을 불리고 자르며 작동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수행적이라 하겠다. 이는 완료형에 대한 보기를 강제한다기보단, 현재진행형에 대한 능동적 관람을 요구한다. 관람자로부터 비롯되는 “수행성”이 전제되는 순간, 비로소 이 전시의 조건은 성립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웹페이지에 중첩되고 있을 전시의 이미지와 관람자의 경험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여기 흘러들어오는 이미지는 어디로 고이고 어디로 흩어지는가? 이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다음 장은 어디인가?
#6
«cut! cut! cut!» 프로젝트는 전시가 전시를 재료 삼고 작업이 작업을 재료 삼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미끄러지고 뒤섞이며 질주한다. «cut! cut! cut!-Index»에 따라붙은 인덱스(Index)라는 꼬리말은 작업에서 파생되어나온 A4 비율 이미지를 재료 삼은 전시(«cut! cut! cut!»)에 대한 암시, 그러니까 단서이자 미끼로서의 이미지를 더듬고 추측해 어딘가 물질로서 존재할 원본을 상상하게 했던 인덱스의 인덱스라 볼 수 있겠다. 여기 네 개의 분절된 전시들은 다시 스스로를 중심 삼아,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하며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에 대한 선후 관계와 경계를 흐리고 뒤흔들며 혼합현실을 구축한다. 가상과 실재공간을 핑퐁처럼 오가며 공간, 지면, 웹이라는 지지체 위에 잠시 안착한 그것들은 새롭기도 하고 새롭지 않기도 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관람자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편집되고 소멸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